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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 왜곡의 판도라 상자 '칠지도'의 비밀속으로

충남도청 2011. 1. 17. 11:42

최근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열풍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자칭 사회 지도층을 자랑하는 남자 주인공(현빈)의 매력적인 말투에 빠져들어

드라마 대사가 유행어로 떠오르는가 하면

여자 주인공이 입었던 옷이 유행 트랜드가 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그런데 '시크릿 가든'이 방영되는 같은 시간대에

타 방송사에서는 '근초고왕'이 방영되고 있었으니

이럴때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란 시가 떠 오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운명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근초고왕'을 선택했다.^^

 

 

 

 

사극에 나오는 '근초고왕'의 모습이다.

삼국은 물론 중국까지도 다 정복해버릴것 같은 저 강렬한 눈빛

백제 역사속에 저 눈빛만 끝까지 살아 있었어도 지금처럼 백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근초고왕(346~375년)은 백제 제 13대 왕으로 백제 부흥을 이끌었던 강력한 왕 중에 한 사람이었다.

369년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하고, 371년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점령하여 고국원왕을 전사하게 하였다.

이를 통하여 백제는 강력한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최근 '근초고왕'이라는 드라마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이 '칠지도'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다.

백제역사 재현단지를 방문했을때 처음으로 칠지도에 대해서 알게 되어 개략적으로 훑어 보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 칠지도 모양을 본딴 사비타워가 부여 금성산에 세워진다는 기사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래서 칠지도에 대해 좀더 깊이 알고 싶어졌다.

 

칠지도를 최초로 발굴한 사람은 메이지 시절 이 신궁의 주지 간 마사토모(菅政友)다.

마사토모는 그의 나이 50세가 되던 1874년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주지 대궁사(大宮司)로 취임한다.

신궁 내에는 ‘금족지(禁足地)’라는 신성한 땅이 있었다. 

이 신궁은 일본 신무천황(神倵天皇)이 나라를 평정했다는 신검을 모신 곳으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는 특수상자가 있어 누구도 열어봐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있었다.

그런데 1873년에 대궁사로 취임한 마사토모는 그 해 8월

천 수백 년 간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던 전통을 깨고, 이곳에 은밀히 침투하여
일왕가의 보물과 수많은 부장품을 발굴하게 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칠지도였다.

 

 

 

 

 

그는 몸통에 6가지가 붙어있는 이상하게 생긴 철제품이 상자 속에 들어있어 유심히 관찰하다가

녹으로 덮인 몸통의 녹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다가 61자의 글자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글자를 통해 칼의 이름이 칠지도(七支刀)라는 사실과 만든 내력을 알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칠지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일본인 간 마사토모였던 것이다.

칸 마사토모가 일본서기의 기록에 보이는 신공황후(神功皇后) 52년 기사에 맞게

칠지도의 내용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본래 칠지도에 써 있는 내용대로라면 백제 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하사품이 칸 마사토모에 의해  백제왕이 왜왕에 바친 진상품으로 변질된 것이다.

 

하사품과 진상품 사이의 차이는 참으로 엄청나다.

이는 곧 일본이 고대 한반도를 지배하고 식민지로 삼았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물증이라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일본인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일본의 역사에 맞게 왜곡되어 발표된 칠지도에 대한 진실의 베일을

처음 벗긴 사람은 북쪽의 역사학자 김석형이었다.

그는 광복 후 63년에 처음으로 이 칠지도에 관심을 갖고 일본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김석형은 칠지도가 5세기 때 강성했던 백제왕이 황제의 입장에서

역내 제후 성격의 지역 통치자(후왕)들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석형의 이러한 주장은  한일간에  뜨거운 논쟁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칠지도는 한ㆍ일간 그 제작연대와 동기에 대해 서로의 주장이 상반되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바쳤다는 주장과 백제왕이 일본 왕에게 하사했다는 주장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고 있다.

제작시기도 136년 전 최초의 발견자인 칸 마사토모가 268년 제작이라고 주장한 후

369년, 372년, 408년, 445년, 468년, 480년 설까지 여러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역사적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쳐서 고국원왕을 죽인 그야말로 백제의 국력이 최고에 달했을 당시 제작하여

일본왕에게 하사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372년의 제작임이 유력하다.

 

 

 

우리 역사중에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가슴 아픈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백제 근초고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백제가 일본에게 하사품을 전달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실여부가 좀더 빨리 밝혀지면 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부여군에서 아주 의미있는 계획을 발표했다.

바로 '칠지도' 사비타워 건립이다.

 

부여의 또 하나의 브랜드 마크가 '칠지 전망 타워'가 될 전망이라는 소식을 접하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부여는 특히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고장이다. 그런데 일본 관광객들이 부여에 와서 '칠지도'를 보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물론 이 칠지도의 진품은 일본 나라현 텐리시에 있는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보관 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의 국보급 보물 칠지도를 바로 백제인이 만들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또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했다는 진실은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질 일이다.

 

 

 

 

이번에 조성될 칠지타워는 총사업비 50억원을 투입하여 부여읍 시가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금성산 정상에

4m의 높이로 백제 전성기의 힘을 상징하는 칠지도 모형의 8방면 전망대로 설치된다.

 

특히 사비전망타워에 올라가면 백제탑 석양, 백마강에 비친 달 등 부여의 신 8경을 감상할 수 있다.

그동안 부여군에서는 사비전망타워 건립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백제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과 연계해 사업비를 확보한 후

주민의견수렴 절차를 거쳐 최적의 설치안을 마련, 시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어떻게 칠지도을 부여의 상징물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참으로 기특하다 못해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하루 빨리 백제 아니 부여를 상징할 수 있는 칠지전망타워가 완공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또 칠지전망타워에 올라가서 백제의 부흥을 이끌었던 근초고왕의 강렬한 눈빛으로 부여 시가지는 물론

일본까지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시안이 열렸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보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