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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문헌서원에서 느낀 문화유산의 업적과 위대함

충남도청 2013. 7. 25. 10:04

 

 

 

서천 문헌서원에서 느낀 문화유산의 업적과 위대함

- 학문적 경륜을 추모하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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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남도 곳곳에는 학문적 경륜을 추모하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서원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 서천의 문헌서원은 다른 서원들과 규모나 학문의 깊이 면에서 차원이 다르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문헌서원은 서천이 자랑하는 문화유산임과 동시에 서천6경에 들어가는 곳입니다.

  제가 문헌서원에 가자마자 느낀 것은 서원의 광대함은 물론이고, 이색 선생의 학문적 경륜이나 남겨진 문화유산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많다는 생각이었습니다. 

 

▲ 문헌서원 입구 홍살문

 

▲ 문헌서원 전경

 

▲ 역대 이색선생의 후학과 문헌서원을 지켜낸 분들을 기리는 비석입니다.홍살문 왼쪽에 세워져 있습니다.


  문헌서원은 가정 이곡 선생과 목은 이색 선생의 학문적 업적과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이색 선생의 아버지이시기도 한 이곡 선생은 고려 후기 학자로 유명하신 분이죠.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가전체 작품인 ‘죽부인전’은 물론이고, 무려 100여편이 넘는 시가는 오늘날까지 ‘동문선에 전해집니다.

  특이한 사실은 이곡 선생의 이력중에 이분이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사실입니다.

 

▲ 목은 이색 선생이십니다.


  이미 원나라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아 문명을 떨친 아버지를 둔 이색 선생 역시 고려 후기 문신이며 학자이십니다.

 

  원나라와 명나라의 정권 교체기에 친명정책을 지지하였고,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던 분으로도 유명합니다.

  문헌서원은 선조 27년(1594)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고 합니다. 그 뒤 광해군 2년(1610)에

 한산고촌으로 옮겨 다시 세웠고 그 이듬해에 나라에서 문헌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하네요.

 

  이후에 고종 8년(1871)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지만 그 후에도 처음 문헌서원이 있던 곳에

 단을 만들고 분향해 오던중 1969년에 지금 있는 자리에 다시 짓고

 문양공 이종덕 한 분을 더하여 여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1969년 지어진 것으로 1984년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2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진수문입니다. 안에는 석석채, 존양재, 전사청 등이 있습니다.

 

▲ 진수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 제일먼저 만나는 진수당입니다.

 

▲ 서재인 석석채입니다. 동재와 함께 서원의 원생들과 손님들이 거처한 서재로서

 주역의 건건석척에서  유래한 말을 따서 석석채라 불렀다 합니다.

 

이 말의 뜻은 "군자가 종일 조심하고 조심하여 저녁에 두려운듯 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다"라는 뜻이라 합니다.

과연 선비다운 글귀입니다.(문헌서원 안내문 원문 발췌)

 

 ▲ 동재인 존양재입니다. 맹자의 존양경찰에서 유래한 말로서 원생들이 마음의 본성을 지켜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에서 지은 이른이라 합니다.(문헌서원 안내문 원문 발췌)

 

▲ 강륜당입니다. 이곳을 찾은 손님들과 흉허물 없이 학문을 논하던 곳입니다.

 

 

▲ 교육관입니다. 원생과 후학을 기르던 곳입니다.

 

 ▲ 교육관 내부 모습입니다.

 

▲ 전사청입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재기들을 보관한 곳입니다.


  문헌서원은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강당과 진수당, 서재가 배치된 강학 공간입니다.

  서원 안에는 3칸의 사우(祠宇)와, 이색선생 문집 목판각 등이 보존된 창고, 2층 누각으로

 된 6칸의 강당, 3칸의 목은 영당, 목은선생 신도비, 이종덕 효행비각 등이 있습니다.

 

  이색 선생은 조선왕조가 열린 후 직위를 박탈당하고 서인이 되어 섬으로 유폐되는 비운을 맞습니다.

그 후에 학문적 업적을 인정하여 장흥에서 석방된 다음 이곳 서천의 한산으로 와서 다시 3년간 지낸 후 1394년(태조3년) 오대산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는데 1396년 여주 신륵사에 가는 도중에 69세의 일기로 삶을 정리하셨습니다.

 

  목은 영당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 가면 이색 선생의 묘가 나옵니다.


  이곳은 문헌서원의 좌측 기린산 중턱에 해당하는 자리인데, 이 묏자리는 무학대사가 잡은 곳이라고 합니다.

   강학 공간 뒤 한단 높은 대지에 사당을 배치한 묘당 공간인 이색 영당은

 방문객들이 1순위로 찾는 대표적인 명소라고 할수 있습니다.

  사당 뒤에는 배롱나무 꽃이 피어나는데 이 꽃이 활짝 피어오르는 8월이면 배롱꽃이 가지를 따라 피어올라 장관을 이룬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