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보다 화려하다는 부여를 걷다
규암마을 한 바퀴
“당신의 발밑에 피렌체보다 화려한 부여가 있다”라는 제목의 책을 보는 순간, 둔기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이 강렬했으나 ‘설마 그럴 리가 있나’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십 년 전쯤이나 되었으려나 부소산에 산벚꽃이 하얗게 피었을 무렵, 가 본 부여는 백제가 멸망하기 전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왕들이 살았던 도읍지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영락없이 쇠락한 시골의 소읍이었다는 느낌이 남아있는 내게 르네상스의 중심지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단테의 도시 피렌체라니 나가도 너무 나간 것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뭔가 있으니까 이런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까 싶어 이 겨울의 끝자락 금강을 따라 부여로 가는 651번 지방도를 달린다.
스산한 겨울 풍경과 잘 어울릴 것 같은 규암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차를 멈춘 수북정은 백마강을 굽어보고 서 있는 늙은 굴참나무가 지키고 있고 불어오는 차가운 강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자온대 아래를 유유히 흐르는 저 강물은 전라북도 장수에서 발원하여 금산, 옥천 대전, 공주를 거쳐 이곳까지 흘러왔을 것이고 이후 논산을 지나고 서천을 지나 천 리를 흘러 서해로 갈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나루터가 있어 수탈의 중심지이자 충남 서남부 교통의 요지로 1950년대에는 백화점과 술집, 요정이 많았을 정도로 번화한 동네였으나 백제교가 개통되면서 급격하게 쇠락의 길로 접어든 도시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변화가 없었던 모양이다.
길을 걷다 보니 실로 오랜만에 보는 정감이 가는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오래된 건물에 서점이나 카페가 들어서고 공방을 만들어 놓아 사람들이 찾아오는 모양이다. 이 길 끝 나지막한 언덕 위에는 오래된 작은 교회당이 있고 교회당 옆에는 줄을 당겨 종을 치는 종탑이 있다. 이 종탑을 보니 유년시절 고향 집 근처에 있던 교회에서 나던 ‘뎅그렁~뎅그렁~’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이렇듯 오래된 동네 규암마을에는 반갑고 정겨운 풍경들이 있다.
부소산성을 걸어보니 부여에 살고 싶어졌다
부여에 오기 위해 다시 뒤적여 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늦가을 비 오는 날, 저녁 무렵 혼자서 걸을 때 비로소 부소산의 처연한 아름다움을 만끽할 것”이라는 글을 기억하며 ‘아직 산 그늘진 곳에 잔설이 남아있을 것 같은 이즈음 부소산성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걷기 시작한 부소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된 만큼 관리가 잘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객사와 동헌을 지나 부소산성 정문에 이르니 평일이어서 그런지 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안내판이 곳곳에 붙어 있고 잘 정비된 산책로를 걷다 보니 한겨울에도 푸르름을 간직한 소나무와 대나무가 양옆으로 서 있는 충의문을 지나 백제의 세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삼충사 앞에 서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흥하는 나라와 망하는 나라는 거기에 상응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무수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어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군주에서부터 뭇 백성에 이르기까지 살펴야 함을 새삼 새겨본다.
부소산성을 산책하는 코스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아무래도 영일루를 거쳐 사자루, 백화정, 낙화암, 고란사, 서복사지를 거쳐 나오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다고 한다.
아직은 바람이 차갑지만, 조금 가파른 길을 걸어도 땀이 나지 않으니 걷기에 그만이고 평일이어서 그런지 복잡하지 않아 마음속에 담아둔 생각들을 정리하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백제시대 왕들이 목욕재계한 뒤 대신들과 함께 정사를 논했으며 옛사람들이 부소산 최고 경관으로 꼽은 영일루는 위풍당당하고 군창지와 그 주변 일대 잘생긴 굵은 소나무들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견뎌온 것일까 싶고 반월루와 사자루에서 보는 강과 마을들은 참으로 평온해 보인다.
백제가 멸망하던 1363년 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성이 함락되자 궁인들이 백마강으로 꽃처럼 몸을 던져 목숨을 버렸다는 낙화암과 그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백화정 둘레 소나무들은 푸르고, 유유하게 흐르는 백마강은 말이 없고 돛을 단 유람선만 강물을 가르고 지나간다.
낙화암 바위 절벽에 자리하고 있는 고란사 풍경은 산 그늘 밑 겨울 강과 마주하고 있어서 그런지, 떨어진 나뭇잎이 절집의 지붕을 덮고 있어서 그런지, 비탈에 서 있는 나목들 때문인지 을씨년스럽다. 그러더라도 한 번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는 고란정 약수를 두 바가지나 마셨으니 조금 젊어졌으려나…, 종각 옆 백마강변으로 가지를 늘어뜨린 오래된 느티나무에 물이 오르고 여린 새잎이 피어나는 봄날에는 얼마나 근사할까 싶다.

다시 굵은 참나무와 잘생긴 소나무가 주를 이루는 산책로를 따라 서복사지로 내려오면서 이곳 어디에 거처를 정하고 매일매일 이 길을 걸으며 내 남은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든다. 부여의 또 다른 곳도 둘러봐야 하겠지만 부여가 가슴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 규암마을
충남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 155-16
- 부소산성 관광안내 및 입장시간
관광안내 041-830-2880
동절기(11월~2월) 09:00~17:00
하절기(3월~10월) 09:00~18:00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설산님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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