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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리포터

판목운하에 흐르는 역사와 인조임금의 꿈

충남도청 2021. 10. 8. 13:00

판목운하에 흐르는 역사와 인조임금의 꿈

운하의 탄생과 환경의 변화

 


하늘 참 파랗다. 파란 하늘을 보고 있으면 무한한 파란색의 마법이 나의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내 마음과 하늘을 연결하는 마법의 다리 가을은, 하늘을 열고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만든다. 견우와 직녀의 그리움을 이어주는 오작교(烏鵲橋) 같은 형이상학적인 다리는 공간과 시간을 이어주는 자연의 향연(饗宴)이다. 그러니 건널 필요가 없고 즐기면 그뿐이다. 내 마음이 하늘을 담는 것인지, 하늘이 내 마음을 담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늘과 내가 소통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내 마음만 가득하다.

▲ 파란 하늘에 갈매기가 날고 있다.

푸른 하늘만큼 푸른 바다가 있다. 하늘은 높고 바다는 깊어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지만, 바다에는 과거가 있고 하늘에는 미래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은 땅을 딛고 살아가고 있다. 미래의 시간 속으로 나의 생각을 밀어 넣으면 상상이 되고, 과거의 시간 속으로 나의 생각을 밀어 넣으면 논리적인 이론이 된다. 나는 지금 가을이 그려놓은 파란 하늘아래 서있다. 하늘 아래에서 운하를 휘감고 달려가는 바다의 거친 숨소리는 심해(深海)가 토해내는 절규와 같다. 그렇게 굽이치는 파도는 과거로 흘러가고 있었다. 논리성을 갖고 판목운하를 흘러가는 바닷물은 과거보다는 현실에 충실하다.

▲ 바닷물을 채우고 있는 판목운하의 모습

판목운하가 시작되는 남면 신온리 마을은 묵송산(墨松山)을 경계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신온리의 유래는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할 때 신성리(申城里) 일부와 거온리(擧溫里)를 통합했고, 이때 신성리의 ‘신’과 거온리의 ‘온’ 자를 따서 ‘신온리’라고 명명하여 시작되었다. 신온리에서 300m의 연륙교를 건너면 안면도에 들어서는 것이다. 흙이 나무와 식물들을 품고 숨을 쉬던 이곳은 판목운하가 380년 동안 바닷길을 열고 천수만과 서해를 연결하고 있었다. 380년 전에는 태안반도였던 안면곶이 왜 안면도가 되어 연륙교의 끝을 부여잡고 반도의 맥을 이어가고 있을까?

▲ 판목운하를 사이에 둔 좌측 신온리 마을과 우측 안면도

조선시대 인조임금이 천수만과 서해를 잇는 운하공사를 시작했다. 충청감사 ‘김유’가 조운선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서 인조임금에게 제안했다. 육지와 연결된 태안반도의 ‘안면곶’ 시작 부분에 폭 300m의 땅을 파내고 돌을 깨어서 바닷길을 만들고 ‘안면도’로 만드는 대 공사였다. 남면 신온리와 안면읍 창기리 사이에 들어서는 판목운하는 인조임금의 재위시절인 1623년 ~ 1649년까지 29년 동안의 길고 긴 공사였다. 기나긴 토목공사로 인한 백성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우리나라 최초의 판목운하가 완성되자 안면도 내해(內海)인 천수만은 직접 서해로 통할 수 있게 되었다. 해상운송이 발달했던 조선시대는 도성으로 올라가는 물건들을 모두 조운선으로 이송했다. 옛 홍주목을 비롯한 천수만 주변에 위치한 군현의 경우 곡식을 실은 배가 한양으로 올라가려면 안면곶을 돌아가야 했으므로 몹시 불편했다. 그런데 안면운하를 통과하면서 무려 200여리가 단축되었을 뿐 아니라, 안흥량과 더불어 뱃길이 가장 험난하기로 유명한 ‘쌀썩은여’를 피해갈 수 있었다. 게다가 천수만은 안면곶이 천연방파제의 역할을 하고 있어 태풍과 해일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는 천혜의 해상교통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 남당항으로 이어지는 판목운하 위에 연륙교가 보인다

고려시대부터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조정으로 향하는 조운선들이 난행량을 통과할 때 매년 수백 척의 배, 수만 석의 쌀, 수천 명이 조난을 당하였다. ‘난행량(難行梁)’이란, 근흥반도와 신진도 사이의 바닷길을 말한다. 난행량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수로(水路)가 매우 험난하고 암초(賠礁)가 많아서 조운선들이 자주 침몰하는 곳이었다. 오죽하면 조운선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서 ‘난행량(難行梁)’의 이름을 편안함의 시작이라는 ‘안흥량(安興梁)’으로 바꾸었을까.

▲ 연륙교 밑을 흐르는 판목운하의 모습

서해가 시작되는 남면 신온리 드르니항과 천수만이 시작되는 남면 당암리 포구까지 육상으로는 5km의 거리이다. 이 중에서 1.2km의 구간을 삽과 괭이를 이용해서 운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그 수고로움이 오죽했으랴. 판목운하를 굽이치는 파도소리가 남정네들의 울음소리처럼 애처롭다. 수많은 사람들이 판목운하 공사를 하다가 죽었고 바다는 그 영혼들을 위로하려는 듯 노래를 부르는데 장송곡처럼 슬프기만 하다.

▲ 연륙교에서 바라 본 서해 모습

운하(運河)는 선박의 통행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물길을 말한다. 선박 운행 목적이 아닌 강이나 호수의 유량 조절 목적으로 만드는 인공 물길은 방수로(放水路)라고 따로 부른다. 인류의 생활에서 운하의 역사는 기원전부터 시작되었다. 운하는 두 종류가 있는데 유문(갑문)운하와 수평운하로 분리된다. 역사를 보면 운하의 시작을 BC 4000년 경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당시의 운하는 식수와 관개용수를 위한 수로형식인 방수로(放水路)였다.

▲ 운하가 만든 또 다른 이정표가 새롭다

그 후 610년에 중국의 수나라 양제가 황하와 장강을 잇는 1,600km 대운하의 일부를 개통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긴 인공수로인 것이다. 이때부터 운하는 교통수단이 되어 항해용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수평운하는 지리적 여건이 매우 중요하였다.

우리나라는 고려(高麗)의 인종(仁宗)12년(1134)에 착공한 굴포운하(掘浦運河)가 처음이었다. 굴포운하는 천수만(淺水灣)과 연접해 있는 태안읍 인평리와 그리고 가로림만(加露林灣)과 연접해 있는 팔봉면 어송리와의 약 7㎞에 이르는 거리를 개착(開鑿)한 것인데 실패하였다. 당시의 기술로는 거대한 암반(岩盤)과 공사를 한 흙이 조수(潮水)가 밀려오면 허물어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 판목운하로 섬이 된 안면도를 연결하는 연륙교 공사 표식

바닷길은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육상운송에 비해 우위에 있어왔다. 운하의 획기적인 모습은 1973년 네덜란드에서 유문(갑문)운하를 개발하면서 부터다. 물을 채워서 갑문을 닫거나, 갑실에 가득찬 물을 빼면 갑문과 갑문 안의 배는 수면의 높이 때문에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원리다. 이 원리를 이용해서 수면 높이가 다른 두 수역 사이를 통과하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운하가 파나마 운하(태평양~카리브해)가 있다. 운하가 만들어지면 해상운송의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으므로 국가와 국가 간의 무역이 활발해진다.

▲ 신온리 마을 쪽 인도교에서 본 백사장 마을

태안반도에서 판목운하가 한창 공사 중일 때, 조선은 청나라의 침략을 받았다.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 뒤 후금(後金)과 조선은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서 평화유지를 약속했다. 훗날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태종은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다. 그리고 조선이 정묘호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1636년 12월에 조선을 침공한 것이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의 왕은 도성을 버리고 행궁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갈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인조임금은 행궁이 있는 남한산성에서 나와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숙이는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이로써 1637년 1월에 병자호란은 마무리 되었다.

▲ 신온리에서 연륙교를 건너면 바로 안면도이다

1627년부터 1636년까지 9년 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도 판목운하 공사는 계속되었다. 정치가 중요한 것은 국가의 흥망성쇠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국력을 하나로 모으지 못한 인조임금과 조정대신들은 민심을 살펴보지 않았다. 자신들의 몫인 진상품과 세곡 그리고 공납품을 실은 조운선의 안전항해를 위한 욕심이 빚어낸 참사였다. 병자호란을 겪은 후 13년 뒤에 우리나라 최초의 판목운하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 운하를 만들고 끊어진 국토를 콘크리트 길로 이어 놓은 모습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수치를 겪으면서 완공된 판목운하는 380년 동안 무심하게 바닷물을 맞이하고 있다. 인조임금이 조운선의 뱃길을 위해 판목운하를 만들지 않고 국방과 농업에 공을 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판목운하 공사를 위해 동원된 많은 사람들은 배고픔과 고단함을 참아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삽으로 흙을 파고, 곡괭이로 바위를 부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치는 늘 민심과 함께하는 법이다. 권력이 민심을 길들이거나 폭력으로 억압하려 한다면 하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민심(民心)이 곧 천심(天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 해상 교통로 보다 육상 교통로가 발전 한 지금 판목운하가 아쉽다

판목운하에 갇혀있는 바다가 서해로 흐르고 있다. 썰물이 시작 된 것이다. 밀물 때 천수만으로 밀고 들어간 바닷물이 썰물 때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서해와 천수만의 바다가 판목운하를 통해서 서로 교류하고, 안면도민들과 육지는 연륙교를 통해서 교류하고 있다. 판목운하 위에 놓인 이 연륙교는 1970년 대 만들어진 다리이다. 연륙교 아래에 있는 바다가 심연(深淵)의 시간들을 판목운하로 밀고 오면 천수만은 말없이 받아준다. 그리고 바다의 흐름은 역사의 흐름처럼 반복되면서 인류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 판목운하로 섬이 된 안면도에 1970년 처음으로 연륙교가 개통 되었다
▲ 안면도를 잇는 첫 연륙교가 지금은 교통을 통제하고 있다


충남 화이팅!!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나드리님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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